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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7:24-37

장로들의 전통에 관해서 예수님과 유대인 지도자 사이의 논쟁이 있은 후, 예수님은 그 자리를 떠나 이방인들이 사는 지역으로 전도 여행을 떠나셨습니다.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사역을 하셨던 예수님께서 이방 지역을 가신 것은 흔치 않은 장면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부정하다고 여겼습니다. 정결의 참된 의미가 마음의 회개에 있음을 가르치셨던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여겼던 이방인들에게 먼저 찾아가신 것은 그분의 가르침을 행동으로 실천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로 지역은 지금의 레바논에 해당하는 곳으로 당시 이스라엘의 북쪽에 위치한 지중해 연안의 해안 도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로 지방을 가셨을 때,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 중에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수로보니게 여인이 있었습니다. 수로보니게란 ‘수로’ 지방의 ‘보니게’라는 뜻으로 수리아의 페니키아 지역을 가리킵니다. (지역적 개념으로 봤을 때 두로는 도시이고, 페니키아는 두로를 포함한 지방이고, 수리아는 좀 더 큰 지역을 가리킵니다)

27절에서 예수님께서 이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하신 말씀은 꽤나 무례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장로들의 전통에 대한 논쟁 이후 목적을 가지시고 이방 지역을 찾아가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원어를 보시면 여기서 등장하는 개는 ‘퀴나리온’으로 집에서 기르는 작은 강아지를 뜻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했던 개에 대한 단어는 ‘쿠온’이며 이방인을 비하할 때 사용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과 대화하면서 그녀의 믿음을 보시려고 이렇게 말씀을 하셨지만, 이미 완화된 단어를 선택하셔서 그 여인의 믿음을 이끄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28절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이 응답했던 구절에서 쓰인 단어도 ‘퀴나리온’이었습니다.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님의 치유의 장면은 각 사건마다 특징이 있습니다. 하지만 각각 다른 치유의 방법을 사용하시지만 공통적으로 치유를 받는 사람들의 믿음을 세우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을 대화를 통해 증진시켰던 것처럼, 갈릴리로 돌아와 베푸셨던 에바다의 기적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이 가능합니다.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는 대화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사람을 무리에서 따로 데리고 가신 것도, 그의 귀에 손가락을 넣으시고 그의 혀에 손을 대신 것도 모두 그 사람의 믿음을 위해서였습니다. (당시 침에 치유의 힘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특별히 이 사람을 위해서 말이 아닌 촉각과 몸짓으로 말씀을 전달하신 것입니다.

오늘 묵상을 통해 참 좋으신 하나님을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형편을 아시고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21장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디베랴 호수는 갈릴리 호수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이곳은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특별한 곳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이곳에서 대부분의 사역을 하셨고, 어부였던 제자들을 부르신 곳도 바로 갈릴리 호수였습니다. 오늘 본문을 대하면서 한가지 궁금한 점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미 만났던 제자들이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려 했던 것

 
 
요한복음 20장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으로 옮기신 후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안식 후 첫날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여기서 안식 후 첫날은 일요일을 의미합니다. 유대인의 안식일은 금요일 일몰부터 토요일 일몰까지고, 그 다음 날인 일요일은 교회에서 주일 (Lord’s Day) 로 지킵니다. 무덤은 사랑했던 주님이 죽으셨고, 모든 소

 
 
요한복음 19장

빌라도의 법정에서 예수님은 조롱과 모욕을 당하십니다. 군인들은 가시관을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며 “유대인의 왕”이라 비웃습니다 (2-3절). 그러나 요한은 그 조롱을 통해 오히려 진실을 드러냅니다. 그들이 조롱하던 그 이름이 바로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왕이셨습니다. 다만 그분의 왕권은 세상의 방식과 다릅니다. 칼과 권력이 아니라, 침묵과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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