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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4장

후견인이란 당시 로마의 법률에서 부친이 사망한 뒤에 남아 있는 미성년을 위해 관리인을 세우는 제도였습니다. 그리고 청지기는 특별히 그 가정의 재정을 관할하는 자였습니다. 미성년이 성년이 되었을 때 혹은 그의 아버지가 정한 때가 될 때 비로소 이 사람은 주인의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이을 자이지만 율법 아래에 있을 때는 초등학문 아래에서 종 노릇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안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을 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표를 따라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것은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입니다 (4절).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위해서 주어진 율법 아래 계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아래에 나신 이유는 율법의 정죄로 죽게 된 인간의 죄값을 지불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인류의 죄값을 “속량”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 일을 이루셨습니다.

속량은 한자로 ‘속죄할 속’과 ‘좋을 량’을 쓰는데, 여기서 ‘량’은 ‘자유하다’ 라는 뜻도 있습니다. 속량의 사전적 의미는 값을 치르고 노예를 풀어 주어 자유인이 되게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우리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첫번째 성도들에게 “아들의 명분”을 주고 (5절), 두번째 “아들의 영”이신 성령님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셔서 성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을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우리의 정체성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는데, 우리가 예수님을 몰랐던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겠냐고 사도 바울은 반문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우리를 아는데 어찌 우리가 종 노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사라를 통해 나은 아들 이삭을 인정하셨고, 여종 하갈을 통해 나은 이스마엘은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사람은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아니라 성령을 따라 난 자입니다.

우리는 초대 교회에서처럼 율법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는 않지만, 오늘날에도 율법을 대신해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아닌 종교 생활로 전락해 버린 신앙 생활은 다른 모든 사람들을 정죄하며, 자기 스스로에게 종교 생활이라는 멍에를 지게 합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는 더 이상 종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자유합니다.

오늘 하루 성령 충만하며, 주 안에서 자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21장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디베랴 호수는 갈릴리 호수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이곳은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특별한 곳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이곳에서 대부분의 사역을 하셨고, 어부였던 제자들을 부르신 곳도 바로 갈릴리 호수였습니다. 오늘 본문을 대하면서 한가지 궁금한 점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미 만났던 제자들이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려 했던 것

 
 
요한복음 20장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으로 옮기신 후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안식 후 첫날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여기서 안식 후 첫날은 일요일을 의미합니다. 유대인의 안식일은 금요일 일몰부터 토요일 일몰까지고, 그 다음 날인 일요일은 교회에서 주일 (Lord’s Day) 로 지킵니다. 무덤은 사랑했던 주님이 죽으셨고, 모든 소

 
 
요한복음 19장

빌라도의 법정에서 예수님은 조롱과 모욕을 당하십니다. 군인들은 가시관을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며 “유대인의 왕”이라 비웃습니다 (2-3절). 그러나 요한은 그 조롱을 통해 오히려 진실을 드러냅니다. 그들이 조롱하던 그 이름이 바로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왕이셨습니다. 다만 그분의 왕권은 세상의 방식과 다릅니다. 칼과 권력이 아니라, 침묵과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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